이하는 친구 사이인 두 여자의 대화이며,
어느 소설의 한 단락을 발췌한 것이다.
“이 집 얼마나 나가니?”
“맨날 그 타령이지. 이 동네 집값 안 오르는 건 너도 알잖아.”
“우리 아파트는 6억에 팔라고 자꾸만 졸라서 귀찮아 죽겠어.”
“뭐, 6억? 너 그거 작년 이맘 때 3억 주고 산 거 아냐? 지지리도 안 팔리는 아파트라 분양가만 주고 층 수도 마음대로 골라서 산다더니 그게 그렇게 올랐어? 말도 안 돼. 그건 정말 말도 안 돼.”
명희는 세차게 도리머리를 흔들며 간신히 비명같은 소리를 냈다.
가슴이 무두질을 하듯이 아파왔다.
이 책의 내용을 아주 간략히 발췌하여 소개하겠다.
같은 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온 '명희'와 '혜진'은
결혼해서도 바로 이웃집에 살게 된 사이좋은 친구였다.
(혜진의 소개로 명희가 결혼하게 되었기 때문에)
같은 학교를 나왔으니 스펙도 비슷하고
남편들도 비슷한 회사의 과장 자리여서 월급도 서로 빤하고
살고 있는 집도 똑같이 허름한 단독주택이며
심지어 아이까지 똑같이 셋이었다.
두 사람 다 남편의 빠듯한 월급으로
셋씩이나 되는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억척 주부였다.
딱 한 가지 두 사람이 다른 것은,
작년에 '혜진'이 집을 시험삼아 내놓았다가 팔려서
'변두리의 미분양된 아파트'로 이사간 것이었다.
그리고 딱 1년 후,
'혜진'은 두 배로 올라버린 집값에
우아한 사모님의 자태로 변신하여
'명희'의 집에 방문해서 나누는 대화이다
이 두 여자의 대화를 조금 더 이어서 보겠다.
“글쎄 말야.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세도 싼 모양이야. 자꾸만 팔라는 걸 보면…”
“그럼 1년 사이에 가만히 앉아서 3억을 벌었단 말이지?”
“3억이 뭐 많니? 큰거 가진 사람들은 1년에 10억도 버는데.”
“10억은 그만두고 3억만 해도 한 달에 얼마씩이냐? 2천 500 아냐. 손끝 하나 까딱 안하고 2천 500씩을 벌었단 말이지, 네가?”
“꼭 그렇지도 않아. 우리 동네가 별안간 바람을 탈 때만 해도 한 달에 5천씩 오르더라. 요샌 뜸해서 한 천만원 씩 오르나 봐.”
똑같이 빠듯한 살림을 살던 주부였던 두 사람은
단지 1년 전에 둘 중 한 사람이
'변두리 미분양 아파트'(원작 표현)를 샀던 것으로
그만 이렇게 인생이 갈려 버렸다.
읽으신 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실 것이다
실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그대로이니....
그러면 이 책은 과연 언제 나온 책일까?
각자들 한번 머릿속으로 예상해 보시고 나서
아래를 이어서 읽으시기 바란다.
정답은 놀랍게도 무려 30년도 더 전,
1989년에 발간된 책이다.
박완서의 '서울 사람들'이라는 중편으로,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다.
(주의: 각자 생각해 볼 기회를 갖기 위해
일부러 원작에 등장하는 돈 단위를 모두
내가 열 배로 부풀려 써놓았음을 참고 바란다
즉 3억은 원문에 3천만 원이고 6억은 원문에 6천만 원이다
돈 단위 외에는 원문 그대로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30년 전, 초등학교 때였다.
책에 수록된 동명의 중편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도 무척 재미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서울 사람들' 이었다.
당시 나는 지방의 600만 원짜리 작은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고,
어린 내게는 서울 사람들의 이야기가 별세계의 이야기로 보였다.
즉 작중의 3천만원이니 6천만원이니 하는 집값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무척 비쌌던 것이다.
작중에서 '빤하다'고 표현된 가장들의 월급 50만 원을 보고는
와 역시 서울 사람들은 잘 버는구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 아빠는 월 30만 원을 벌고 계셨기 때문에...
그 외에 30년이 된 지금까지 또렷이 기억에 남는 것은
'혜진'의 독백인
'향기로운 로션을 온몸에 바르리라' 하는 구절이었다.
'혜진'이 '명희'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명희'네 집 변소를 푸는 날이었고 ;;
혹여 X 푸는 인부가 X지게 숫자를 속일까봐
억척스레 손가락에 성냥개비를 쥐고
일일이 숫자를 세고 있는 명희를 보며
혜진은 '왜 저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아' 하고 생각하며
코를 싸쥐고 나오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얼른 집에 가서 샤워를 하고 싶었다.
연탄먼지와 오물냄새를 씻어내고
향기로운 로션을 온몸에 바르리라.'
문제는 X치우는 인부에게 속지 않게 성냥개비로 셈하는 것이
바로 1년 전까지 혜진이 하던 짓이고
명희가 혜진이 하는 걸 보고 배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1년 사이에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에 힘입어
혜진은 그 억척스럽고 구질구질한 시절을 다 잊어버렸다.
모른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잊어버린 것이다.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혜진의 그런 위선이 우스워
30년이 지나도록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30년이 지난 요즘 문득문득 이 책이 기억나서
최근에 다시 찾아서 읽은 소감은 이러하다.
[아 세상은 참 돌고 도는구나
30년 전에도 미분양 사태는 벌어졌었고
그때도 집을 사고 / 사지 않은 그 단순한 행위로
인생이 갈려버린 사람들이 존재했구나]
원작에는 3천만 원짜리 집이 1년 만에 6천으로 올랐는데
이 집안 남편들의 월급은 50만 원이었다.
이때 오른 3천만 원은
충분히 두 사람의 인생을 갈라버릴 수 있는 돈이었던 것이다.
이 책이 나온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그 후에도 실제 미분양 사태는 여러 번 벌어졌고
집값이 떨어진 적도 여러 번이었을 것이다.
'명희'는 저 때 '혜진'을 보며
자신도 그 '변두리 미분양 아파트' 한 채를 사지 않은 것을
가슴이 미어지도록 후회했을 것이다.
만일 실존 인물이라면
저 때 30대였으니 지금은 60대가 되었을 텐데
그 30년 사이에 기회가 여러 번 왔을 것이다
과연 명희는 그 다음에 온 기회를 잡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도
'그 때 살걸, 아니면 그 때라도 살걸,
아니지, 하다못해 그 때라도 샀더라면...'
하면서 후회에 후회를 쌓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당시 이 책을 읽으며
'와 서울 사람들은 가난해도 저 정도는 사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지방의 가난한 집 초딩이었던 나도
어느덧 30년이 지나
그 서울에 버젓이 내집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30년 전 '명희' 쪽의 시선에서 책을 읽었다면
지금은 '혜진'의 시각에서 좀 더 생각해보게 되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사실 나 역시 전세 1700만 원짜리 옥탑방에 살던 것이
채 십 년도 되지 않는 일이다.
결혼해서 처음 얻은 집조차도
채 1억이 안 되는 변두리 빌라 전세였다.
물론 그간 내가 열심히 살며 근검절약을 통해
내 집을 마련하고 자산을 불려 온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운도 분명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마치 그렇게 살았던 적이 없던 것처럼,
내게는 세입자였던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혹 교만을 떨고 있지는 않았는가?
혹시 나의 무심한 말 한 마디가
'단지 집 한 채 안 산 것이 죄인'
무주택자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는가? 등....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실 이 '서울 사람들'은
내가 그 부분에만 포커스를 맞추어 이야기해서 그렇지
꼭 부동산과 집값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무주택자는 무주택자대로
유주택자는 유주택자대로
깊이 생각해 볼 지점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무주택자들에게는
살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또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므로...
함께 수록된 이 책과 동명의 소설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도 무척 재미있으니
여러분께 일독을 권한다.
뒤에는 '혜진'이 새 아파트 청약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청약을 이렇게 했구나, 하고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ps. 서평 이벤트 열흘은 하려고 했는데
자꾸 그 사이에 글을 올리게 되네요...ㅋㅋ
글 자주 쓴다는 자체로 아무쪼록 기특하게 여겨주시고
다음 글에 진짜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
[출처] 아파트 한 채로 인생이 갈려 버린 두 여자의 이야기 (부동산 스터디') | 작성자 삼호어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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